비평의 새로운 공간 - 크리티카

  

 



5호를 내며: 민주주의, 문학의 정치, 그리고 비평
1. 40년 전 시인 김지하가 쓴 시의 한 구절.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 몇 년 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없었다. 어쨌든 형식적으로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길게 얘기하지 힘들지만, 그 이유는 민주주의의 완성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법의 지배도 아니고 민주적 통치형태도 아니다. 이런 시각은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고, 민주주의를 형식이나 통치형태의 문제로 앙상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지배’라는 원리를 유일한 원리로 할뿐 그 형식과 내용은 빈곤하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 형식과 내용을 갱신하고 채워야 한다. 시민들이 자신을 주권자가 아니라 ‘법적 주체’인 ‘국민’으로 인식하는 데 머물 때, 시민은 자신을 대리하는 통치 권력에 굴복한다. 지배해야할 시민이 지배당하는 민주주의의 역설.

국가권력을 포함한 모든 한국사회의 권력(국가, 사회, 기업, 종교단체, 학교 등)은 대중들의 참여와 개입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갖고 있다. 그 불신에 맞서 싸우는 시민사회의 역량에 민주주의의 미래가 걸려 있다. 시민은 민주주의를 재발명해야 한다. 물론 이런 과정은 힘들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을 외면할 때 민주주의는 ‘그들만의 민주주의’인 과두제나 파시즘으로 전락한다. 민주주의는 시민에게 언제나 주권자다울 것을 요구한다.
  
2. 민주주의와 문학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최근 논의된 ‘문학의 정치’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기에 처한 한국 민주주의의 갱신에 문학은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그러나 문학은 언제나 말과 글로 정치를 한다. 무슨 뜻인가? 때로 문학인들도 직접적으로, 행동으로, 거리에서 정치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문학의 정치의 본령은 아니다. 문학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말과 글을 통해 이뤄진다. 한편으로 말과 글의 정치는 힘이 없다. 날 것 그대로 힘을 과시하는 천박한 권력의 추한 몰골 앞에서 말과 글은 무기력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든 정치행위가 말과 글을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다면 문학의 정치야말로 정치의 본령에 다가간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말과 글의 소통에 있다. 한국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의 핵심도 소통의 부재이다. 소통이 없을 때, 힘 가진 자들의 말과 글만이 사회를 지배할 때 민주주의는 몰락한다. 영어로 독재자는 dictator이다. 혼자 떠드는 사람이란 뜻이다. 권력자는 일방적으로 떠들고 시민들은 그 말을 받아쓰기(dictation)하는 사회. 그것이 전체주의 사회이고 파시즘 사회이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혼자 떠드는 권력에게 자기성찰은 없다. 문학은 말과 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입장과 시각을 제시한다. 왜 소통이 필요한가를 말과 글로 조곤조곤 제기한다. ‘진리’를 전달하는 완벽한 말과 글은 없다. 그것이 설령 권력의 말일지라도. 문학의 언어, 비평의 언어는 최대한 치밀하고 엄정하게 말과 글을 관통하는 정치의 양상을 조망하고 분석한다. 공허한 권력의 언어와 말을 해부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진리’를 해체한다.  

  3. [크리티카 4호]에서 우리는 ‘문학의 정치’를 새롭게 조망하는 특집을 기획했고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믿는다. 이번 5호에서 동인들은 4호 기획에 이른 ‘문학의 정치’ 두 번째 특집을 기획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무산되었다. 무엇보다 동인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아쉽다. 하지만 비록 특집으로 문학의 정치를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못했으나 비평꼭지에 실린 글들을 통해 이 문제를 산발적으로나마 다룰 수는 있게 된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비평란 첫 번째 글인 정은귀의 「불행한 서정과 젊은 시의 정치학」은 정면으로 ‘시와 정치’의 관계를 파고든다. 이 글은 최근 우리 평단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던 시와 정치에 관한 논의를, 2000년대 이후 젊은 시인들의 실험적 언어와 불행한 서정의 관계의 탐색을 통해 깊이 있게 검토한다. 이른바 ‘미래파’라고 불린 시인들은 그들의 시가 보여주는 난해함과 시답지 않음, 탈문법적 언어로 인해 시적 방법론의 관점에서는 많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들 시가 현실과 맺는 관계의 양상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점에 필자는 착안한다. 김언, 신해욱, 김소연, 진은영 등 우리 시단의 젊은 시가 불행한 서정을 정직한 감각으로 그려내면서, 정치를 넘어서는 탈주체의 시학/정치학을 구현하고 있다고 필자는 분석한다. 필자는 미학과 정치학 혹은 실험 대 서정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시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랑의 첫 만남과 흡사한 하나의 사건으로 시와의 만남을 풀어낸다. 비평란의 나머지 글들은 소설론이지만 직간접적으로 정은귀의 문제의식을 잇는다.

  두 번째 글인 권희선의 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은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W. 제발트의 [이민자들]을 비교분석하는 글이다. 필자에 따르면, 이들 작품은 적지 않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더불어 많은 미적 전략을 공유하고 있다. 세 작품 모두 뿌리 뽑히고 터와 몫을 빼앗긴 자들의 현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비유, 묘사, 대화, 문체 등에서 절묘하고 탁월한 언어감각을 보여준다. 이들 작품은 소설 장르에 요구되는 완미한 서사성을 결여 내지 초과하고 있다. 세 작품 내부에서 벌어지는 현실, 언어, 서사 세 차원의 얽힘은 각기 다른 방식과 개성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필자는 황정은 작품에서 구사되는 새로운 언어와 재현의 전략을 높이 평가한다. 작품 곳곳에 웅덩이처럼 고인 서늘한 공포와 온순한 절망, 차곡차곡 쌓인 체념과 무기력의 지층은 어느덧 우리를 따스하지만 불길한 어떤 공간으로, 새벽인지 저녁인지 모를 어스름의 시간으로 안내한다. 이 소설은 독특한 개성과 빛깔을 가진 문장과, 새로운 알레고리적 재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찢긴 현실을 오래 들여다보고 아픈 목소리에 오래 귀기울여온 작가만이 획득할 수 있는, 소설적 성취라는 것이다. 이것은 ‘착함’이 아니라 ‘침착함’이라 부를 만한, 현실과 언어에 대한 작가의 지난한 고민의 결과라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강우성의 글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는 편혜영 작품집 [저녁의 구애]를 관통하는 일상의 동일성과 그 반복의 형상화를 알레고리적 독서에서 탈피하여 그것에 담긴 넓은 의미의 윤리적/정치적 함의를 읽어보려는 시도이다. 동일성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인물들은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소외나 기계적 삶의 무의미성을 느끼기보다 묘한 안도감과 함께 그 일상의 반복에서 위안을 얻는다. 이 안도감은 [저녁의 구애]의 인물들, 특히 남성인물들이 세상에 향해 스스로를 닫는 댓가로 얻어지는 환상에 기원을 둔다. 이 환상의 존재로 인해 [저녁의 구애]는 알레고리적 세계와 결별하고 타자와 욕망의 관계로 얽힌 윤리적 세계에 진입한다. [저녁의 구애]는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삼으려는 편혜영의 낯익은 사내들이 자신들이 구성한 환상의 세계 속에 비타협적으로 머무르려는 동시에 밖으로 호출되는 과정의 기록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경재의 글 「네이션을 넘어선 연대의 가능성」은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고자 한 탈국경적 상상력의 경과와 과제를 검토한다. 김려령의 [완득이]는 이주민들과 어울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보여준다. 그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제거하여 우리 곁에 두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은 이주자들의 타자성과 고유성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가네시로 가즈키의 [GO]이다. [GO]에서는 ‘나는 나일 뿐이다’는 명제와 ‘나는 인류다’라는 명제가 제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사회의 통합이 아닌 더 큰 불안과 폭력을 낳을 수도 있는 사회의 분리로 우리를 이끌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차이의 확인에 그쳐서는 안 되며 차이에 바탕한 새로운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현재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러한 차이를 공동체에 대한 기여로 만드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박형서의 [나나]�는 이와 관련해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김대성의 「불가능한 문장」은 괴물처럼, 이방인처럼, 아이처럼, 갑작스럽게 마주친 야생 동물처럼, 누군가의 동공에 포착된 내가 모르는 ‘나’처럼, ‘당신’의 얼굴처럼, 불현듯 도착하는 불가피한 문장에 관한 글이다. 필자에게 있어 ‘문장’이란, 존재와 관계(공동체)에 이미 깊이 관여하고(연루되어) 있는 실체이다. 이 글은 공동체 안에서의 삶, 그 던적스러운 삶을 밀고 나가기 위해 쓰는 불가피한 문장(김훈)과 공동체 밖에서 들어온 이방인, 혹은 공동체 밖으로 추방된 사회적 타자의 문장(조해진) 사이에서 공명하고 있다. 김대성은 불가피한 삶의 지반이 불가능한 문장을 써내는 동력이 되며 그렇게 씌어진 불가능한 문장 앞에서 우리들이 머물 수 있을 때 지금껏 교환해왔던 공동체의 언어의 한계와 가까스로 대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4. 리뷰란에는 두 편의 영화평과 두 편의 서평이 실렸다. 오길영의 글 「철학, 철학자, 영상매체」는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영화 <데리다>를 분석한다. 이 글은 이 흥미로운 기록영화에 표현된, 철학자의 삶과 철학의 관계, 그리고 철학과 영상매체의 관계에 대한 데리다의 사유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 <데리다>의 촬영에 대한 데리다의 양가적 태도가 드러내듯이, 데리다는 영상매체 시대 철학과 철학자의 위상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관심이 잘 드러난다. 어떤 의미에서든 20세기 가장 탁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의 삶과 사유를 담은 이 희귀한 기록영화는, 데리다 자신의 말대로 철학자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해체론 창시자의 이미지와 말을 후대에 영상으로 전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두 번째 영화평인 김효선의 글 「뒤늦게 <하나 그리고 둘>을 보다」는 에드워드 양 감독의 영화 <하나 그리고 둘>에 대한 소회를 적은 글이다. <하나 그리고 둘>은 중년의 페이소스가 녹아든 인생의 축약판과도 같은 영화다. 이 글은, 먼저 감독의 영화세계를 간략히 조망하고, 이어서 <하나 그리고 둘>의 이야기 구도를 살핀 뒤, 영화가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을 차례로 소개하며, 삶과 영화에 대한 감독의 시각을 짚는다. 에드워드 양의 이미지들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공존을 타진한다. 그가 영화에 담아낸 것은 생의 앞면과 뒷면이 나란히 놓인, 일종의 삶의 지형들이다. 이 글은 <하나 그리고 둘>이 전하는 소박한 위로를 통해서 영화, 그리고 예술이 삶 속에서 무엇을 가능케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고자 한다.

  서평란에 실린 두 편의 글은 다루는 책에 대한 요약과 소개의 단순서평을 넘어서 필자 나름의 날카로운 분석과 평가를 보여준다. 권성우의 글  「논쟁과 자존- 서경식의 [언어의 감옥에서]에 대해」는  최근 “우리 시대 최고의 에세이스트”로 평가받는 재일 디아스포라 에세이스트 서경식의 신간 [언어의 감옥에서]를 논한다. [언어의 감옥에서]는 지금까지 소개된 서경식의 다른 어떤 책보다도 ‘논쟁가로서의 서경식의 면모’를 인상적으로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기왕에 소개된 서경식의 책 중에서 가장 단호하고 투철한 비판정신으로 채워져 있다. 특히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제목의 3부에서 서경식은 흔히 양심적이며 진보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 논객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의 입장은 일본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재일조선인 등 소수자를 배제하는, 진정한 사과와 자기반성이 결여된 가해자의 입장에서 자유롭지 않다. [언어의 감옥에서]를 통해, 우리는 화해를 주장하는 담론의 문제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더불어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려는 저자 서경식의 투철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명호의 글 「폭력을 무릅쓰는 혁명적 해방정치-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은 지젝의 폭력론에 대한 비판적 읽기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젝은 폭력의 세 차원을 구분하고 있다. 주관적 폭력, 객관적 폭력, 상징적 폭력이 그것이다.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주관적 폭력이지만 지젝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객관적/구조적 폭력이며, 그것을 은폐하는 자유주의적 관용의 논리의 허위성이다. 지젝에게 자본주의 시대의 구조적 폭력은 ‘자본 그 자체’이다. 자본-폭력에 맞서 지젝은 그가 벤야민에 기대‘신적 폭력’이라 부르는 혁명적 폭력의 정치적 가능성을 옹호한다. 문제는 원한과 복수가 정의와 구분되지 않을 때 신적 폭력이 그야말로 폭력 그 자체로 떨어질 가능성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해방적 폭력에 대한 지젝의 과격한 수사가 매력적으로 들리면서도 끝내 충분히 설득되기 어려운 것은 그의 수사가 과격해지면 질수록 현실적 대안과 미래적 전망은 점점 더 먼 곳으로 밀려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대중과 대중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릴 때 폭력을 불사하는 급진적 해방정치에 대한 유혹은 커진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운위되는 작금의 현실에서 일독할 만하다.

  번역란은 [크리티카]만의 고유한 성격을 보여주는 꼭지이다. 이번 호의 번역란에는 영국 소설가 D. H. 로런스의 에세이 「도덕과 소설」을 김성호의 번역으로 싣는다. 1925년에 씌어진 이 글에는 한편으로는 전쟁 이전의 지배 이념이던 부르주아 도덕주의와 감상주의 및 사실주의 미학에,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의 냉소주의와 모더니즘 미학에 모두 거리를 두면서 삶과 예술의 의미를 새롭게 궁구한 작가의 사유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현실의 ‘객관적’ 재현도, 과잉된 미적 자의식도 예술의 본령이 아니며, 예술, 특히 소설은 인간과 우주의 순간적으로 ‘완성된’ 관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성취’한다는 로런스의 발상은 번역자가 해제에서 언급하듯이 감상성과 냉소에 분점된 오늘날의 한국 문학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줄 것으로 믿는다.  

5. 최소한 1년에 동인지 한 권은 거르지 말고 내자는 약속을 내부적으로도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역시 동인역량의 문제이다. 이번 5호 출간을 계기로 크리티카 동인활동의 쇄신을 다짐한다. 다른 문학잡지들만큼의 기동성이나 신속한 대응은 못하겠지만, 느리고 천천히 이뤄지는 행보에 걸맞는 깊이 있는 탐구, 날카로운 분석과 비판의 시각만큼은 동인지 출간에서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이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쇄신과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동인지 매 호를 낼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인문서 특히 [크리티카」 같은 순수 비평지의 상업성을 크게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시 출간을 맡아준 도서출판 올의 후의에는, 앞으로 더 좋은 비평지를 만들겠다는 다짐으로 감사의 말을 대신한다.  

                            2012년 2월
                              오길영  

* 책소개

'매체 산업으로부터 독립적인 비평', '학문적 관심과 결합시킨 비평', '스스로 기획하고 쓰는 자율적 비평', '함께 읽고 검토하는 공동체적 비평'을 지향하는 동인 '크리티카'의 다섯 번째 동인지가 출간되었다. 비평과 리뷰, 그리고 번역 꼭지로 구성된 이번 호에서는 지난 4호와 달리 동인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은 기획은 없지만, 시대의 현안을 뜨겁게 고민하되 언제나 아카데미즘의 엄정한 논리를 잃지 않고 문화 현상 전반을 냉정하게 조망하고 분석하고자 하는 '크리티카' 동인들의 비평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다채롭게 수록돼 있다.

* 목차

권두언 민주주의, 문학의 정치, 그리고 비평_오길영

비평

불온한 서정과 젊은 시의 정치학_정은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황정은 '백의 그림자', 헤르타 뮐러 '숨그네', W. 제발트 '이민자들'_권희선
교환 불가능한 차이로 가는 길_강우성
네이션을 넘어선 연대의 가능성_이경재
불가능한 문장―김훈과 조해진의 소설_김대성

리뷰

철학자와 철학, 그리고 영상매체―영화 「데리다」 읽기_오길영
「하나 그리고 둘」이 그리는 삶의 지형_김효선
논쟁과 자존―서경식의 '언어의 감옥에서'_권성우
폭력을 무릅쓰는 혁명적 해방―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_이명호

번역

'도덕과 소설' 옮긴이 해제_김성호
도덕과 소설_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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