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새로운 공간 - 크리티카

  

 



4호를 내며: 역설을 직시하며 곤경을 견딤
이기영은 1933년에 쓴 「서화」의 시작 부분에서 주인공 돌쇠를 통해 “세상은 점점 개명을 한다는데 사람 살기는 해마다 더 곤란하니 웬일인가?”라고 말한다. 한 세기가 흘렀음에도 삶의 도처에서 화려함 이면의 낮선 광경과 마주치고 불현듯 삶의 공포를 느낄 때마다 되씹게 되는 구절이다. 한국에서의 근대, 자본주의 이후 우리 삶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매번 다른 형태로 반복되는 역설. 그리하여 민주주의이되 민주주의가 아니며 풍요롭되 풍요롭지 않은 87년 이후의 삶 혹은 최근의 우리의 삶까지도 깊게 밝혀주는 통찰이 아닐까?

이 역설을 비평의 영역에 국한하여 사고한다면 비판을 자임할수록 자본주의적이게 되는 곤경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2000년 이후 우리 문단을 지배해온 여러 화두들, 그것들을 둘러싼 논의들이 화려함과 내밀한 논리로 스스로를 뽐낼 때, 정작 비판을 자임했던 주체는 그럴수록 더 이 덫에 걸려 고통스러워했던 것이 아닐까? 곤경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충혈된 눈으로 그 역설을 노려보는 것이야말로 비평의 자세이리라.

충혈된 눈이라니……, 동인들 모두는 턱없다고 부정할지도 모르고, 곤경은 곤경인데 그런 곤경은 아니라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저마다 이런 형국에 처해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비판’의 공간을 만들겠다며 모인 것, 혹은 모이려고 하는 것이 󰡔크리티카󰡕로 보인다. 그저 웃고 있지만 저마다의 충혈을 숨기고 있으며, 동의하지는 않아도 최소한 이해는 할 수 있는 모임 말이다.

그것에 대한 의식의 강렬함과 형태는 다를 수 있으니 도저한 냉소로 혹은 맹목적인 증오로 나타나기도 하며, 술 취한 자의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으로부터 논리, 논리뿐인 언어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말들 혹은 정반대의 말들이 있을 뿐, 의젓한 소통도 의젓한 주장도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더욱이 이제 한 권의 동인지를 덧붙여, 모임을 준비하는 기간까지 합해 7년 동안 겨우 네 권이라니……. 생산력의 시대에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이렇게 살아도 된다. 통상 의젓한 소통일수록 명목뿐인 소통이고, 발 빠른 생산력일수록 무의미한 반복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매체 산업으로부터 독립적인 비평’, ‘학문적 관심과 결합시킨 비평’, ‘스스로 기획하고 쓰는 자율적 비평’, ‘함께 읽고 검토하는 공동체적 비평’을 지향한다면서 턱없는 목표를 내세웠으니 오히려 모든 비판, 자의식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번호는 어떤 면에서 보면 ‘스스로 기획하고 쓰는 자율적 비평’이라는 원칙을 깨뜨린 호이다. 특집을 기획했으니 말이다. 그 결과물에 대해 논의하면서 특집 글을 쓴 동인들까지도 ‘툴툴이 스머프’처럼 투덜거리고 마지막까지 예전의 형식처럼 차라리 특집을 이론 란으로 처리하자는 주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틀리거나 설득력이 없다고 욕먹을지 몰라도 뻗댈 때는 뻗대는 것도 한 방식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상황이란 종잡을 수 없이 극과 극을 오가게 만드는 상황이며, 그리하여 어떤 의젓한 주장이란 대체로 누구의 말에 전폭적으로 동의하여 그 말에 따라 사고하기 십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특집 란에 실린 글들은 󰡔크리티카󰡕가 그 동안 견지해 온 ‘누구에게도 거리두기’를 여전히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몫은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김성호의 「문학의 정치와 정치적 보편성—특집을 마련하며」는 최근 전개된 ‘시와 정치’ 논의들에 대해 나름의 입장을 제시하는 동시에 특집란에 실린 글들의 문제의식을 아우르고 있는 글이다. 치안과 정치, 정치와 미학, 정치와 보편성의 관계 등에 대해 어떻게 사고해야 할지, 그 방향성 제시는 물론 일층 진전된 논의를 펼치고 있다. 오길영의 「시민문학과 정치  : 백낙청의 ‘시민문학론’을 다시 읽으며」는 그동안 민족문학론에 가려 폄하되었던 백낙청의 시민문학론을 시민, 정치성에 초점 맞추어 다시 사고하는 글이다. 단순 해석을 넘어 시민문학론을 현재화하고, 정치화한다는 점에서 현재적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글이다. 변현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정치」는 벤야민이 파시즘을 가리켜 ‘정치의 미학화’라고 했을 때, 그것이 사실은 치안의 논리로 변해버린 미학의 과잉, 정치의 상실을 의미하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야 말로 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글이다. 한번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현재적 문제의식 속에서 설득력 있게 규명하고 있다.

오길영과 변현태의 글이 뻗대는 글이라면 황정아의 「인권의 보편성과 정치성」, 강우성의 「문화번역의 정치성」은 조심스럽게 작은 것만을 주장하고자 작정한 글인 듯싶다. 각각은 정치에 초점을 맞추어 ‘인권 담론’, ‘문화번역’과 관련된 여러 이론적 논쟁점을 꼼꼼히 소개하면서, 이론의 정치성 혹은 적지만은 않은 실천적 함의 또한 제시하고 있다. 「인권의 보편성과 정치성」은 인권의 보편성이 어떠할 때 정치적이게 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용산에서 작가들이 정치를 내세웠을 때 사실 잃은 것은 무엇이고 앞으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를 사고하고 있으며 「문화번역의 정치성」은 예의 「문학과 윤리」(󰡔크리티카󰡕 1호), 「이론의 이론성에 관한 단상」(󰡔크리티카󰡕 3호)에 이어, 이번에는 버틀러의 ‘문화번역’을 대상으로 이론의 정치성을 꼼꼼히 논의하고 있다.

비평 란의 김성진의 「수난과 구원의 서사를 넘어서 : 권정생의 한국전쟁 3부작론」은 3부작 중 「몽실언니」를 제외한 「초가집이 있던 마을」, 「점득이네」의 경우 선한 공동체와 악한 외부의 폭력이라는 도식에 지나치게 갇혀 있다고 비판함으로써 권정생 소설이 무비판적으로 신성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글이다. 박상준의 「한없이 초라한 인류에게 주는 박민규의 영가」는 박민규 소설의 여러 특성들, 즉 우주적 상상력, 일상생활에 대한 끊임없는 참조 등을 밝히고 다양한 차원에서 발견되는 그의 예외성이 사실 우리 한국소설이 지향해왔던 것과 밀접히 닿아 있다는 점을 규명하고 있다. 정은귀의 「쥐 되기의 욕망과 정직한 환멸 : 편혜영의 <재와 빨강>론」은 󰡔재와 빨강󰡕을 그간의 그로테스크한 불쾌의 미학이 더욱 성숙하여, 시대의 환멸과 불안을 생태적 유물론에 뿌리를 둔 정직한 시선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본다. 그리하여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쥐 되기’란 우리의 삶의 비루함의 이야기, 그럼에도 지속되는 일상적 삶의 욕망에 대한 환멸의 이야기라 평가한다.

김대성의 「추방과 생존 : 리얼리티 TV 쇼와 지워진 얼굴」은 문화 비평이다. 리얼리티 TV 쇼와 미니홈피 및 블로그 등의 1인 미디어를 관통하는 정서를 추방과 생존에 대한 공포로 진단하며,  이로 인해 공동체의 장소, 정치의 장소여야 할 얼굴이 ‘지워진 얼굴’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 분석하면서 그 절멸의 구조를 타개할 경로를 모색한다.  

이 번 호의 리뷰 란은 김동수의 「길은 끝났는데 여행은 시작되었다 :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가 홀로 지키고 있다. 김동수의 동인의 글은 가라타니 고진의 여러 논의에 대해 수긍하면서도 대안들과 관련하여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의해 중층결정된 유토피아적 사고가 아닌지 의심하며, 전망부재의 상태를 솔직히 인정하는 가운데 마르크주의의 고유성을 다시 사고할 필요성을 환기시키고 있다. 꼼꼼한 독서에 기반 하여 사유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글이면서, 우리 동인지가 내세운 본격 리뷰에 걸 맞는 글이다.

이번 호에도 번역 란에 고전이면서도 여전히 문제적인 글,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제3판)에 대한 김경식의 번역과 해제가 실렸다. 이번호의 특집과도 무관하지 않을 이글의 제목을 뭐라고 해야 할지 현상금을 걸고 공모하기도 했다. ‘기술적(인) 복제가능성 시대의 예술작품’, ‘기술적(인) 복제가능 시대의 예술작품’, ‘기술적으로 복제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등등. 이런 저런 논의 끝에 결국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으로 낙착이 되었다. 조사 하나에 의미가 완전히 바뀐다는 문제의식, 이는 그간의 우리의 번역사를 고려할 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문제의식일 것이다. 번역은 물론 해제인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 작품’을 읽기 위하여」 역시 문제의식에 값하는 글로서 번역 작업도 고도의 학술적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얼마 전 어떤 책인지 모르겠는데 우연히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구절을 읽고 일순간 매우 즐거웠던 경험이 떠오른다. 즐거웠다니? 사정은 이러하다. 무식한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내가 아니라 상대방인 너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읽었던 것이다. 평소 한편의 너무나 슬픈 죽음과 한편의 너무나 질긴 생명을 보면서 ‘그들은 안 죽나, 그러니 죽는다는 것에 슬퍼하지 말자, 참으로 공평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이 구절을 읽으며 나도 죽는다는 것은 잊고 너도 죽는다고 기뻐했던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나 뿐 아니라 ‘너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고 우기고 싶다. 마음을 편케 하는 너무나 많은 윤리와 종교가 있는 반면 마음을 불편케 하는 정치는 너무나 적기 때문이며, 뭐라하든 정치의 본질 중 하나는 억압에 대한 적대이며 지금은 마음을 편케 하는 화해에 계속해서 뻗대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겨도 크게 죄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신부님은 고해성사하러 들어와서 이렇게 말하는 할머니를 보면 즐겁다고 한다. “제가 이 나이에 무슨 죄를 져요, 나 죄 진 것 없어요.” 그러니 우리 모두 죄를 졌으면 얼마나 졌겠는가? 조금 뻗댄다고, 조금 적의를 가진다고 뭐 그리 크게 죄가 될 것인가?

상업성과 도대체 관계없는 비평지임에도 불구하고 2, 3호에 이어 또다시 출판을 맡아주었고 앞으로도 계속 맡아주시겠다는 권일경 대표의 호의에 감사드린다. <사피엔스21>의 인문사회분야 임프린트로 새로 출발한 출판사 <올>의 번창을 기원한다. 그리고 동인들의 원고를 아담한 책으로 만들어주신 편집부 직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10년 7월 조현일 씀

*책소개

'매체 산업으로부터 독립적인 비평', '학문적 관심과 결합시킨 비평', '스스로 기획하고 쓰는 자율적 비평', '함께 읽고 검토하는 공동체적 비평'을 지향하는 동인 「크리티카」의 네 번째 동인지가 출간되었다. 이번 호는 「특집」란을 기획하여 '스스로 기획하고 쓰는 자율적 비평'이라는 기본 원칙의 틀을 깨뜨린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에게도 거리 두기'를 여전히 실천하며 기존의 색깔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번 호에서는 「문학, 정치, 보편성」이라는 특집에서 최근 전개된 '시와 정치'에 대해 나름의 입장을 제시하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비평란에서는 권정생과 박민규, 편혜영의 작품을 비판하고 리얼리티 TV쇼와 미니홈피 등의 1인 미디어를 관통하는 정서에 대해 진단하는 문화 비평을 함께 실었다. 이외에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의 리뷰와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의 번역과 해제를 만나볼 수 있다.

* 목차

권두언 역설을 직시하며 곤경을 견딤 / 조현일

특집 문학, 정치, 보편성

문학의 정치와 정치적 보편성-특집을 마련하며 / 김성호
시민문학과 정치-백낙청의 「시민문학론」을 다시 읽으며 / 오길영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정치 / 변현태
인권의 보편성과 정치성 / 황정아
'문화번역'의 정치성 / 강우성

비평

한없이 초라한 인류에게 주는 박민규의 영가 / 박상준
'쥐 되기'의 욕망과 정직한 환멸-편혜영의 『재와 빨강』론 / 정은귀
수난과 구원의 서사시를 넘어서-권정생의 '한국전쟁 3부작론' / 김성진
추방과 생존-리얼리티 TV 쇼와 지워진 얼굴 / 김대성

리뷰

길은 끝났는데 여행은 시작되었다-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 / 김동수

번역

논문 해제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을 읽기 위하여 / 김경식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 발터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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