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새로운 공간 - 크리티카

  

 



3호를 내며: 위기를 살아가는 커뮤니티를 향하여
위기의 시대다. 문학의 위기나 인문학의 위기, 기초 학문의 위기...... 그리고 이 위기들에 대한 말들은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디 이뿐인가. 경제 위기, 금융 위기 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위기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일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는 체제의 주변부에 위치한 모든 것들의 ‘삶 그 자체’일 듯하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나 광우병 파동, 연초의 용산 사태는 이 사실을 웅변해준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위기(공황)가 내재해 있다는, 마르크스의 고전적인 테제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는 것도 이러한 위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또한 ‘위기 담론’의 시대다. 문학과 문학 비평에 대해서만 말해보기로 하자. 문학의 위기 담론이 문학의 종언 담론으로 확장되어 우리 주변을 떠돈 지 이미 오래다. 이 장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해내고 (‘도스토옙스키의 시대에도, 20세기 초반에도 문학은 죽었다고 선언되곤 했지......’) 이를 종종 있어왔던, 의례 그런 일로 간주하는 태도는 그다지 책임 있어 보이지 않는다. 가라타니 고진에 의해 촉발된 최근의 근대 문학의 종언 담론이 나름대로 이 시대에 문학과 비평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들을 끌어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해를 피해두기로 하자. 필자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근대 문학의 종언론에 한 마디를 보탤 능력도 의도도 없다.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위기를 대하는 태도, 혹은 위기 담론이 갖기 마련인 어떤 지점이다. 소위 ‘위기 담론’은 그 속성상 위기 상황의 급박함을 잘 드러내어주는 동시에 바로 그 상황을 특권화함으로써 예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경향을 갖는다. 그 결과 종종 위기란 그 정세를 둘러싼 어떤 외적 조건의 문제로, 따라서 그 외적 조건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함으로서 조절되는 어떤 것으로 사고된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처세의 속설은 위기에 대한 이러한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문학의 위기, 문학 비평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런 논리를 적용할 수 있을까?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제쳐두더라도 6-70년대 스탈린주의 청산 문제와 관련해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다루는 그의 작업은 ‘위기론’ 일반의 관점에서 시사적이다. 스탈린주의로 인해 촉발된 마르크스주의 일반의 위기라는 상황 속에서 알튀세르는 스탈린주의가 스탈린 숭배라는 우연하고 외적인 계기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하는 하나의 편향, 즉 경제주의적 편향의 결과다. 요컨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마르크스주의에게 위기란 항상 스스로에 내재하는, 그리하여 특정한 정세 하에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얼굴을 내미는 어떤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주변부로서의 문학 혹은 문학 비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굳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의 예술 적대성’과 같은 무시무시한 테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위대한 문학 작품들, 뛰어난 문학 비평이 언제나 그 자신을 낳았던 시대를 대표하는 동시에 실은 그 시대와 불화함으로써만 스스로의 위대함을 증명해왔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이 때 불화의 대상인 시대는 외적 조건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내면화된 어떤 것이다.

따라서 위기는 우리에게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작업을 요구한다. 첫째, 위기를 구성하는 현재의 정세를 파악하고 대처하기. 둘째, 보다 발본적으로 현재의 위기를 재생산해내는 근본적인 구조를 묻고 분석하기. 이 경우 물론 그 근본적인 구조란 주체 자신을 포함하는 것이 될 것이다.

좀 거창하게 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실은 우리의 동인 모임, 크리티카에 대해서 필자 자신이 개인적으로 느끼고 있는 바를 말하고 싶어서다. ‘비평 정신이 살아있는 비평 전문지, 비평적 관심과 학문적 관심을 생산적으로 결합한 비평 전문지’를 목적으로 동인 모임을 시작한지 벌써 만 5년이 넘었다. 2년 만에 1호를, 다시 1년 만에 2호를, 그리고 다시 2년 만에 3호를 내게 되었다. 성적표만 가지고 보자면 만족하기 어렵다. 3호에 실린 글 중 1년 가까이 묵힌 원고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편집 위원들의 게으름과 성의 부족에 대해 편집 위원의 한 사람으로 책임을 느낀다. 누군가가 동인 모임의 위기라고 말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부끄러울 정도로 빈약한 생산성에 대해서 이런저런 분석이 있을 수 있겠다. 가령 동인들 대부분이 학진 사업이나 학과 업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승진 및 재임용 기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아카데미 노동자’라는 사실을 들어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앞서 언급한 ‘문학의 위기’나 ‘인문학의 위기’ 같은 정세가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무력감이 또 다른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크리티카라는 동인 자체의 ‘존재’로 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있어 보인다. 애초에 우리가 기획했던 크리티카는 어떤 것이었던가? 창간호를 내면서 우리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목표를 내세운 바 있다. ‘다른 매체산업의 논리나 지향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비평 행위’, ‘비평적 관심과 학문적 관심을 결합시킨 전문적인 비평 행위’, ‘동인 스스로 글을 기획하고, 스스로 쓰는 자율적인 비평 행위’, ‘동인들의 글을 동인들이 모여서 읽고 검토하는 공동체적인 비평 행위’. 이제 와서 보자면 다소 무모한, 그러나 「크리티카」로서는 앞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이러한 목표들이 어쩔 수 없는 ‘낮은 생산력’을 가져왔다라고 생각한다면, 나르시스적인 태도일까?

물론 현재의 성적표에 만족할 생각은 없다. 저 앞에서 열거한 목표와 원칙을 지키면서도 보다 활발한 동인활동을 가능하게 해 줄 ‘전술들’을 준비해야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 구성된 편집위원장 이하 편집위원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 이번 3호에 실린 글들이 저 목표와 원칙에 얼마나 부합하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다만 동인의 한 사람으로써 저 목표와 원칙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지난 2호의 구성(비평, 이론, 번역)에 리뷰란을 새로 만들었다. 그때그때 공간되어 이슈를 제시하는 책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이슈화하고 싶은 문제들에 대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글들을 위한 난을 만들고 싶었다.

박찬부 교수의 신간, 󰡔기호, 주체, 욕망󰡕에 대한 서평의 형식으로 한국에서의 라캉 수용 및 라캉 이론 자체를 비판하고 있는 오길영 동인의 글 「라캉 정신분석학의 몇 가지 문제」나, 최근에 씌여진 루카치에 대한 글이나 책에서 나타나고 있는 루카치에 대한 왜곡과 착각, 오역과 오독을 꼼꼼하게 검토하면서 이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의 난점과 결부시키고 있는 김경식 동인의 글 「루카치 공부하기의 어려움-인문학 공부의 기초와 관련하여」는 앞으로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리뷰란의 ‘표본’이다. 앞으로도 리뷰란에 가볍지만 예리한 글들이 많이 투고되기를 기대한다.

비평란에는 조현일, 이경재, 차원현 세 동인이 투고해주었다.

조현일 동인의 글 「정념과 윤리-권여선론」은 최근 활발한, 그리고 의미 있는 작품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권여선을 다루고 있다. 장편 󰡔푸르른 틈새󰡕(1996)와 작품집 󰡔처녀치마󰡕(2004), 󰡔분홍 리본의 시절󰡕(2007) 등 전 작품들을 대상으로 ‘정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권여선의 작품세계를 규명하고 있는 이 글에서 조현일 동인은 권여선 소설이 현재의 정치와 윤리를 고민하는 방식을 야망(암바시오)과 증오라는 키워드로 풀어내고 있다.

이경재 동인의 글 「근대의 문턱에서 넘어진 한 여인의 초상-신경숙의 리진론」은 신경숙의 소설 󰡔리진󰡕에서 나타나고 있는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지위,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의 갈등, 보편화 된 식민주의의 문제점, 근대의 매혹과 냉혹, 타자에 대응하는 윤리적 방식 등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이러한 꼼꼼한 읽기를 통해 이경재 동인은 󰡔리진󰡕이 19세기말 조선이 직면한 절망의 구조와,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살았던 제 3세계 약소국 여성의 보편적인 삶을 체현하는데 성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차원현 동인의 글 「최근 문학윤리론에 대하여」는 복도훈, 강유정, 허윤진, 신형철 등 네 젊은 비평가들이 쓴 문학윤리론에 대한 메타비평이다. 차원현 동인은 문학의 종언에 부정의 윤리를 내세우고 있는 이 네 젊은 비평가들의 문학윤리론에 한편으로 공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논리를 비판하고 있는데, 차원현 동인의 글 또한 실은 바로 그 ‘부정의 윤리’를 구성해보고자 하는 시도일 것이다.

세 동인의 글이 현재 한국 문학의 한 면을 일별할 수 있게 해준다면, 이론란의 강우성, 김성호 동인의 글은 문학의 정치성, 지젝 같은 최근 이론 담론의 ‘뜨거운 감자’를 다루고 있다.

강우성 동인의 「이론의 이론성에 관한 단상」은 최근 북미 학계의 관심사로 등장한 이른바 ‘이론의 죽음’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면서 지난 30여년간 이론이 추구해 온 작업의 공과를 따지고 있다. 이론 및 이론연구가 여전히 의미 있는 사유 행위임을 주장하면서 강우성 동인은 이론의 이론성은 구체적인 텍스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개별 비평의 차원에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일반’에 대한 해체론의 주장이나 벤야민의 ‘번역’ 작업처럼 ‘보편성’의 영역에 관한 비평적 사유에서 탁월하게 발휘된다고 주장한다.

김성호 동인의 「보편성의 귀환—지젝의 다원주의비판과 문학적 보편성」은 다문화주의와 ‘정체성 정치’가 진보의 대명사로 통하는 지적 풍토에서 뻔뻔스러우리만치 당당하게, 그러나 또한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보편적 실재를 사유해온 지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다원주의 이후에 과제로 남은 문학적 보편성의 의미를 새롭게 묻는다. 지젝의 보편성 개념을 ‘구조적인 보편성’으로 규정하고 여기에는 어떤 편향, 지젝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틀림’이 내속하고 있음을 분석하면서 김성호 동인은 이러한 ‘비틀림’을 지닌 보편성, ‘독특한 보편성’이야말로 종말론에 시달리는 우리 시대의 문학에 주어진 진정한 가능성이자 목표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번역란에서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메니페스토로 간주되는 시클롭스키의 「말의 부활」과 「장치로서의 예술」을 실었다. 약속드린 대로 앞으로도 이 난을 통해 문제적인 글들을 계속 번역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편집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앞으로 나올 「크리티카」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옛 말씀 한 구절로 「크리티카」 동인의 한 사람으로서의 필자 스스로의 태도를 다스리고자 한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기꺼이 󰡔크리티카󰡕 3호의 출판을 맡아주신 사피엔스21 출판사 권일경 대표와 원고를 다듬어 주신 편집부 직원들에게, 의례적인 긴 인사말은 이 경우 비례가 될 듯하다. 다만 감사한다는 말을 전할 뿐이다.

2009년 6월 변현태

<차례>

004_위기를 살아가는 커뮤니티를 향하여

비평
016 정념의 윤리·정치학―권여선론 조현일
060 근대의 문턱에서 넘어진 한 여인의 초상―신경숙의 「리진」론 이경재
084 최근 문학 윤리론에 대하여 차원현

이론
122 이론의 이론성에 관한 단상 강우성
158 보편성의 귀환―지젝의 다원주의 비판과 문학적 보편성 김성호

리뷰
196 라캉 정신분석학의 몇 가지 문제―「기호, 주체, 욕망」의 비판적 읽기 오길영
218 루카치 공부하기의 어려움―인문학 공부의 기초와 관련하여 김경식

번역 변현태
242〈해제〉러시아 형식주의와 시클롭스키―낯설게 하기와 새로움에 대한 지향
264 말의 부활
276 장치로서의 예술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GGAMBO

Copyright ⓒ 2006 크리티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