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새로운 공간 - 크리티카

  

 



<크리티카> 창간사 - 새로운 비평 커뮤니티를 향하여
여기, 몇 사람의 뜻을 모아 조촐한 비평지 하나를 세상에 선보인다. 이미 (문학)비평이 그 전성기를 지난 지 오래인 오늘, 오로지 비평만으로 구성하는 잡지를 낸다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 아닐 수 없다. 한동안 문학비평은 철학과 정치 및 사회비평, 미학과 윤리학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글쓰기의 지위에 올라 그 전성기를 누린 적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문학비평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1920-30년대에도 그러했거니와, 불과 2,30년 전인 1970-80년대에도 문학비평은 지식인 사회 전반에서 일종의 공론장을 형성했었다.

1930년대에 임화(林和)는 러시아의 아나키즘 사상가 크로포트킨(P. Kropotkin)의 논법을 빌어 당시 문예비평이 대단히 정론적이고 활발했던 이유를 ‘두색(杜塞)된 정치사상 혹은 사회비평의 한 개의 방수로(放水路)’(곧 정치사상이나 사회비평이 외적인 이유로 봉쇄당한 데 따른 일종의 물꼬)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찾은 적이 있다. 임화는 문예비평이 지나치게 정론적이고 왕성했던 이유를 정치적인 이상(異狀) 상황으로 돌린 셈이지만, 비단 그러한 이상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문학이, 그리고 문학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비평이 오로지 문학 자체만의 영역으로 관심이 국한되지 않고, 넓게는 사회정치적 현안을 비롯하여 인간 삶을 삶답게 해주는 미적?윤리적 영역에다가 더 나아가서는 인간 삶의 온갖 사소한 관심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인간적’ 문제들을 다룰 수 있고 또 그러해야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날은 비단 비평뿐만 아니라 문학까지도 아예 예전과 같은 종합예술적인 지위를 상실해가고 있다. 이는 단지 영화나 방송극, 디지털 게임을 비롯하여 문학을 대신할 수 있는 다양한 매체의 새로운 예술 장르들이 더 큰 힘으로 대중을 사로잡고 있다는 데에 연유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각 영역의 분화와 전문화가 고도로 진행되어 결국에는 각 영역의 의사(擬似) 자립화와 그에 따른 고립화를 초래한다는 데에 있다. 물론 이들을 묶어주는 연결의 고리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사이의 연결 관계는 더욱더 강화되어, 이제 더 이상 그로부터의 탈출구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회적인 네트워킹이 고도화되어 가고 있다. 각 영역의 의사 자립화와 이들을 남김없이 망라하고 묶어주는 전 사회적 네트워크. 이 네트워크의 최상위에 위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시장과 인터넷이다.

우리는 시장과 인터넷이 지금 우리에게 불가피하게 주어져 있는 환경이자 조건임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에 의해 형성되는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는 모든 것들을 관계짓지만 결코 그 자체로 참된 소통과 그에 기반한 주체의 형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소통과 주체 형성에 비평이 기여할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평은, 오늘날 과거에 비해 놀랄 만큼 위축되어 있지만, 문학이나 여타 예술(작품과 행위를 포함하여)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계에 대한 개진(開陳)이라든가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의 개별적인 소통을 한층 더 넓은 범위로 확산하고 심화시켜, 문학과 예술을 매개로 하는 일종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데 관여한다. 하지만 오늘날 비평의 위축과 문학시장에의 종속 상황은 비평이 이러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양적으로 볼 때에는 오늘날 문학만이 아니라 비평도 그야말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십 종이나 발간되는 문학잡지들은 빠짐없이 비평을 수록하고 있고 씌어지는 비평이나 그것을 쓰는 비평가의 수도 엄청나게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양적 팽창과 질적 위축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질적 위축’이라는 판단은 개개의 비평작품에 대해서 내려지는 것일 수는 없다. 문학 ‘시장’에 종속된 문학잡지들의 전략적 판단 위에서 청탁되고 개별 비평가에 의해 씌어지기는 하지만 그 ‘이후’가 부재하는 상황이 질적 위축이라는 판단을 불가피하도록 만든다. 비평가와 작가 혹은 독자 사이의 소통뿐 아니라, 더욱 문제인 것은, 비평가와 비평가 사이의 소통조차도 이제는 점차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비평도 역시 단순한 정보로만 습득될 뿐, 작품을 매개로 한 정신과 정신 사이의 소통과 교류라는 본연의 역할을 상실한 상황.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비평지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

물론 이 비평지라고 하여 자동으로 비평 본연의 역할을 담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평 본연의 역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과정을 밟아야 할 터인데, 우리는 이를 위해 우선 비평 전문지이자 동인지라는 형식을 취하고자 한다.

우리가 내고자 하는 저널은 비평 전문지이다. 비평과 에세이만으로 구성할 것이며, 창작물은 우리의 관심 영역이 아니다. 오늘날 숱한 비평가들이 활동하지만, 그들의 비평들은 자신의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종합문예지의 전략에 종속된 비평에 머무르고, 나아가 더 거대한 매체가 허용하는 장에서만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비평행위는 갈수록 증대하지만 그 행위의 독자성은 갈수록 위축된다. 우리는 비평 전문지를 통해서 다른 매체산업의 논리나 지향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비평 행위를 추구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고전적인 ‘비평의 독자성’을 추구한다. 잡지사의 상업성이나 혹은 문학작품의 해설에 종속된 비평이 아니라, 비평 고유의 정신으로 살아 있는 비평. 이는 문학만의 폐쇄적인 영역에 갇혀 있지 않는, 고전적인 인문학 정신과 마찬가지로 문화와 사회, 인간과 예술 전반에 대한 폭넓은 관심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비평지는 문학비평만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문학 이외에 영화와 음악, 미술과 심지어 최근 떠오르고 있는 디지털 서사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들에 대한 문화이론과 사회이론, 철학사상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모든 문화가 우리의 비평 대상이 된다.

나아가 우리는, 오늘날 기존 비평의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버린 세계문학들에 대한 비평까지도 포괄하고자 한다. 그때그때 번역되는 오늘날의 외국문학만이 아니라 고전적인 세계문학 작품들도 분명 오늘날의 우리 독자들이 즐겨 혹은 교양용으로 읽는 대상들이다. 이들에 대한 전문적인 비평을 통해 문학과 문화에 대한 수준 높은 감상과 정신적 교류의 매체가 되고자 한다. 이와 같이 고전적인 비평 정신을 되살리는 길만이 사실은 오늘날의 문화에 대한 종합적이고도 ‘전위적인’ 비평을 가능하게 하리라고 본다.

나아가 우리 비평지는 비평과 아카데미즘을 분명하게 가르고 있는 벽을 허물고자 한다. 오늘날 아카데미즘의 성과들은 그 자신들의 언어만으로 씌어지고 그 자신들만 향수하는 학술지라는 벽에 갇혀 있다. 그러나 사실 가장 전문적인 비평의 능력은 그 분야의 아카데미즘에서의 성과와 결합하여야 나올 수 있다. 또한 아카데미즘의 성과들도 사실은 오늘날의 문화(고전적인 문화들도 오늘날의 대중들이 향수하고 있으면 오늘날의 문화에 속한다)에 대한 비평적인 관심과 결합하여야만 최고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는 비평적 관심과 학문적 관심을 결합하여 비평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자 한다.

또 우리가 내고자 하는 저널은 동인지이다. 그래서 동인으로 참여하는 개개인들 각자의 개별적 기획을 중시하고자 한다. 동인들은 각자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을 자신이 기획하여야 한다. 우리는 동인들이 그러한 기획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인정하며,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에 대해 자신이 기획할 때에 최고의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잡지사에서 정해진 주제로 청탁을 받아서 쓰는 글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테마로 각자 최고 최선의 글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 잡지의 원칙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체적인 기획이 전무한 잡지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 비평계의 동향에 예의주시하면서 그때그때의 쟁점에 개입하고자 한다. 오늘날 비평계에서는 논쟁이 사라지고 있다. 간헐적으로 논쟁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각 매체의 이해관계에 관계하지 않는 한 논쟁이 별반 진전되지 못하고 유야무야되고 만다. 우리는 우리가 의미 있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쟁점에 대해 아무런 이해관계의 계산 없이 개입해 들어가고자 한다. 쟁점이 없을 때에는 쟁점을 만들기도 하고, 의미있는 논쟁은 더욱 부추기며, 이를 통해 비평계의 공론장을 새롭게 형성 혹은 재편하려고 한다. 물론 이 ‘전체’ 기획은 동인 각자의 개별적인 글쓰기 기획과 상충하지 않도록 조정될 것이다.

또한 동인 각자가 자신의 기획으로 글을 쓴다고 해서, 각자는 자신의 글만 책임질 뿐 다른 동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여를 하지 못하도록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동인지라는 형식에 걸맞게 서로의 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 여기에 수록되는 모든 동인의 글은 동인 내의 사전 발표와 토론을 거쳐야 하며, 그 외에도 우리는 오늘날의 중요 문제와 중요 작품에 대해서 정기적인 점검과 토론을 통해 공동의 현안을 지속적으로 확인해 나갈 것이다. 이는 각자가 쓰는 자기 글의 기획에 알게 모르게 흡수되어, 궁극적으로는 우리 각자의 글이 내는 각자의 목소리가 전체적으로는 화음을 이루어갈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동인지라고 하여 동인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글만을 수록하는 폐쇄성에 갇히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뜻을 같이하되 동인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비평 공간을 개방할 것이며, 때로는 여기에 발표되는 글에 대한 의미있는 반론에도 우리의 지면을 기꺼이 할애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 비평지가 뜻을 같이하는 비평 정신들이 함께 공유하는 비평의 커뮤니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각인이 자유의지에 의하여 비평이라는 장르를 통해 자기 고유의 정신을 발휘함으로써 타인과 함께 이룩하는 비평의 커뮤니티. 오랜 논의를 거쳐 우리는 그 이름을 ‘크리티카’로 명명한다.

2년여의 준비 기간을 가진 뒤에야 어렵사리 크리티카의 첫 결실을 펴낸다. 미흡한 점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창간호답게 내용이 그런대로 알차게 채워진 것에 자부심도 느낀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소설작품을 대상으로 한 고전적인 문학비평에서부터 최근 영화에 대한 날래면서도 날카로운 리뷰(이 글은 이번 창간호에서는 유일하게 비동인에게 청탁하여 수록하는 글인데, 올해 초에 원고를 받았으나 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최근’ 영화에 대한 글이라는 소개가 무색하게 되어버렸다. 고료가 없다는 조건임에도 흔쾌히 청탁에 응해주셨고, 거기다가 오랜 시간 책이 나오기까지 기다려주신―아니 우리가 기다리게 만든― 성은애 선생에게 감사와 함께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 작품이 아닌 문학 담론과 미학서에 대한 메타비평에다가 최신의 디지털 서사에 대한 조금은 학문적인 접근 등으로 실제비평 영역도 다채롭게 구성할 수 있었고, 그 외에 루카치와 바흐찐, 데리다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이론가’들에 대한 꼼꼼한 다시 읽기에다가 모더니즘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접근 등으로 이론비평 역시 알차게 구성할 수 있었다.

첫 호를 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상업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출판을 맡아주신 이가서 출판사 이숙경 사장님 이하 편집부 직원들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2005. 11
동인을 대표하여 신승엽


[크리티카 No. 1] 목차

새로운 비평 커뮤니티를 향하여

비평
조현일 : 영원한 슬픔과 니힐리즘의 정치학 - 배수아론
성은애 : 영웅 만들기 - '트로이', '킹 아더', '알렉산더'
신승엽 : 20세기 민족문학론의 패러다임에 대한 몇 가지 반성
오길영 : 탈근대미학과 존재미학의 가능성 - 진중권 미학서 두 권을 읽고
이용욱 : 컴퓨터 게임 스토리텔링의 서사 구조 - '영웅 서사'의 디지털적 변용을 중심으로

이론
강우성 : 문학과 윤리 - 해체론적 물음들
김성호 : 탐닉의 효용 - 모더니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변현태 : 바흐찐 읽기(1) - 대화주의 이전의 대화주의
김경식 : '예술작품의 발생과 가치'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방법 - 루카치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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