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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이장욱, 카라따니 코오진과 근대문학의 '종언'
 신승엽  | 2006·05·03 13:47 | HIT : 2,163 | VOTE : 537 |
창비주간논평(weekly@changbi.com)에 실린 글입니다.
오길영 선생이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글을 준비한다고 해서 퍼왔어요.


카라따니 코오진과 근대문학의 '종언'
이장욱 | 시인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근대문학의 종언]이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의 제목은 (근대)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종언'이다. 수많은 문학 위기론들이 있지만, 카라따니의 '종언'은 확실히 치열하면서도 담백한 데가 있다. '위기'라는 표현에는 어떤 각성에 대한 촉구 혹은 안간힘이 담겨 있지만, '종언'에는 그게 없다. 그의 생각에, 문학의 종언은 "단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맥락이 담겨 있다. 하나는 매체의 발달 등 다양한 역사적 변화 때문에 오늘의 문학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영향력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문학 자체가 왜소해졌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앞의 것은 역사적 조건의 문제고, 뒤의 것은 비평가를 포함한 창작자들의 주관적 상황 문제다. 물론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돼 있으며, 그래서 시대적 · 윤리적 과제를 감당했던 문화적 주류로서의 (근대)문학은 제 역사적 소임을 다한 것으로 판명된다. 카라따니에 따르면, 오늘의 인간 사회가 처해 있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데 문학이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 시대는, "끝났다."

아마도 이 주장에 대한 진지한 반응은 세 가지 정도일 것 같다. 하나는 본래의 문학이 그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는 데 동의하고 문학을 떠나는 것이다. 어디로? 우리가 직면해 있는 수많은 난제들을 감당해내기 위한 운동의 영역으로. 이것은 실제로 카라따니 자신이 (비록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뉴 어쏘씨에이션 운동"(NAM)을 통해 자본주의사회의 내부로부터 다른 삶의 방식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한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문학이나 예술의 종언론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새삼스럽다는 느낌까지 듦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이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이 실천적인 지점이다. 그는 '위기론'이나 들먹이며 제 존재를 확인하려는 나약한 비평가가 아닌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정말 문학을 떠나야 한다는 데 나는 동의한다. 확실히 문학에 초월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가 역사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통상적 관념에는 과거의 문학이 후광으로 남아 있으며, 이 후광에 의지해서 시인, 작가, 비평가들이 (자신도 모르게) 자기만족을 얻는 것은 곤란하다.

두번째는 "종언" 같은 극단적인 표현의 문제를 지적하고 반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문학이 당대사회에 대해 과거처럼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혹은 "운동으로서의 문학"이 그 계몽적 소임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문학이 독자적인 "내면성"을 상실하고 "그저 오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근대소설의 전성기였던 저 19세기에도 그러했듯이, 문학은 이질적인 층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당대에 스며들고 당대에 접속하며 당대와 대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독자층의 이탈 등 오늘의 객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문학의 '죽음'이 확실해 보인다면? 이 사태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역설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미 주변화된(죽어버린) 시와 소설들은, 오히려 그 주변성(죽음)으로 인해서, 더 첨예하게 삶과 세계를 대면할 수 있다고 말이다. 나아가, 이 주변성(죽음)의 자유로움이야말로 정확하게 오늘의 문학이 지닌 가능성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농담처럼, 이렇게 말해보자. 근대문학이 죽었다, 그러자 완강한 체제를 끈질기게 교란하는 유령의 문학이 태어났다! 유쾌하고 불편한, 유령으로서의 문학. 그것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이 유령의 존재 자체가, 그가 교란하려는 거대한 씨스템의 일부라는 데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가장 생산적으로 읽는 방식은 (저자의 의도와 달리) 주관적 반성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것일 터이다. 실제로 카라따니의 종언론은 오늘의 문학에 대해 여러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지적 · 도덕적 요청을 감당하지 않으려는 문학에 대한 질타이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업성에 잠식된 문학에 대한 질타이며, 리스먼(D. Riesman) 식으로 말하자면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타인지향형" 문학에 대한 질타이다. 이 질타에서 창비와 이 글을 쓰는 나 자신 역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주류 문학정론지로서의 [창작과비평]은 그 위상에 합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여전히 지난 시대의 "후광효과"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창작자로서 나는 삶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에 이르고자 했는가? 허망한 차이를 유의미한 개성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아마도 이에 대한 대답에는 "시차"가 필요하겠지만, 지금 이곳으로부터 끊임없는 자기갱신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이런 이질적인 생각들이 혼재된 상태에서 나는 책을 덮었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세 가지 반응과는 별개로, 카라따니식 종언론을 돌파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역시 '문학 자체'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는 "종언"을 확신하게 된 계기를 한국문학의 사례에서 찾고 있지만, "종언"이라는 자극적인 단정으로 우리 문학이 온전히 규정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늘의 문학은 저 불가피했던 계몽과 독백의 시대를 넘어서, 아니 그 시대들을 등에 지고, 여전히 전진중이다. 오늘의 서정시는 압도적으로 규격화된 도시적 삶의 '바깥'을 섬세하고 풍요로운 언어로 환기하고 있으며, 가부장적 언어를 탈피한 시들은 다양한 일탈자들의 영혼을 새로운 언어에 각인시키는 중이다. 소설은 어떤가. 오늘의 삶과 역사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수행하는 소설들이 여전히 생산되고 있으며, 새로운 시점과 인칭을 통해 스스로 ‘질문’이 된 소설들이 있으며, 또 유희 자체를 부정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소설들도 있다. 이들은 서로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 우리 문학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데 기여하는 중이다. [트랜스크리틱]에서 카라따니가 쓴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한국문학은 여전히 끊임없는 "이동(移動)"과 "전회(轉回)" 중에 있다.

이런 신뢰와 애정은 문학을 떠날 수 없는 자의 자기위안에 불과한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라따니의 표현을 변용해서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문학을 떠나서 생각하라. 그리고 그와 더불어, 문학으로 돌아오라.

bloom 고맙습니다. 저하고 가라타니의 문학론을 읽는 문제의식이 비슷해보이네요.

06·05·07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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