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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종의 기원]: 악의 불가해성
 bloom    | 2016·06·21 22:25 | HIT : 209 | VOTE : 37 |
일요일 모임을 위한 발제문은 아니고, 작품을 추천한 '책임감'(?)으로 제 페북에 올린 단상을 올려둡니다. 결론은 작가의 전작들보다는 못하다는 겁니다.  


* 정유정의 [종의 기원]: 악의 불가해성

1. 문학개론에 나오는 상식 중의 하나이지만, 소설에서 서술시점(the narrative point of view)은 중요하다. 어떤 시점을 택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방식이 달라진다. 인물형상화의 방식도 변화를 겪는다. 1인칭 시점을 택할 때도 장단점이 있다. 장점은 서술자인 '내'가 자신이 겪은 사건과 견해, 판단 등을 그의 입장에서 어떤 매개없이 보여주기 때문에, 전달되는 이야기의 생동감과 사실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단점은 시점이 '나'에 한정되기 때문에, 3인칭 시점과는 달리 다른 인물들의 내면을 조감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독자가 1인칭 서술자인 '나'의 관점에 쉽게 동화되면서 비판적 거리를 취하기 힘들어진다는 것. 한마디로 사건과 인물묘사의 입체성이 제약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점과 관객이 비판적 거리를 취하기 힘들어지는 것과 같다.

2. 정유정의 신작 [종의 기원]은 1인칭 서술시점의 미덕과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으로는, 미덕보다는 한계가 더 도드라진다. 작가는 이 소설의 시점을 전작들과는 달리 전적으로 1인칭 시점으로 설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때의 ‘특별한 악인’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유진’이 수정란의 형태로 내 안에 착상된 셈이다. 그렇기는 하나, 나는 여전히 인간으로서도, 작가로서도 미성숙했다. 그를 온전히 이해하고 키워서 존재로 탄생시킬 능력이 없었다. 이 무지막지한 존재를 책임질 용기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쓰겠디는 ‘욕망’뿐이었다. ‘유진’을 여러 형태로 그려낸 이유다. 등단작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선 정아의 아버지로, 《내 심장을 씌라》에선 점박이로, 《7년의밤》에서는 오영제로, 《28》에서는 박동해로. 매번 다른 악인을 동장시키고 형상화시켰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목이 마르고 답답했다. 그들이 늘 ‘그’였기 때문이다. 외부자의 눈으로 그려 보이는 데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결국 ‘나’여야 했다. 객체가 아닌 주체여야 했다.우리의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줄 수 있으려면.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그려 보이려면."(381면)

작가는 외부의 시선으로만 그려지는 '악'의 내면, "우리의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의 실체를 1인칭 시점을 통해 드러내려 한다.  더욱이 주인공 한유진은 순수한 악처럼 그려진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류의 2∼3퍼센트 가량이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 유진은 그중에서도 상위 1 퍼센트에 속하는, 정신의학자들 사이에선 ‘프레데터’라 부른다는 ‘순수 악인’이다. 비둘기의 세상에 태어난 매이자 피식자로 살아가도록 학습받고 억압받으며 성장한 포식자이기도 하다."(382면)

3. 그런데 이런 작가의 의도가 작품 속에 제대로 구현되었는지는 의문이다. 한 인물의 내면만을 파고드는 1인칭 시점을 택하게 되면, 자칫 두개의 편한 길을 택하기 쉽다. 첫째, 모든 인간들이 그런 것처럼, "포식자"에게도 나름의 정당화 논리가 있다는 것을 따라가게 되는 것. 이유와 변명이 없는 인간, 혹은 악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독자는 그 '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이해는 하지만 용서를 안하면 되는가. 둘째, 그 악의 근원이 악인의 책임인지, 아니면 상황의 탓인지를 명확히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악의 '자질'(?)을 갖고 있다면, 그때 그가 악인이 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어쩌면 이 소설에서 제일 흥미로운 대목은 이 두번째 문제와 관련된다. 한유진은 선천적인 "포식자"인가, 아니면 잘못된 주위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악인가. 나는 이 질문이 이 작품의 핵심에 놓여 있다고 본다. 그런데 작가는 이 질문을 강하게 붙잡지 않는다. 작품의 끝에서 서술되는, 감추어진 과거의 첫번째 살인 혹은 사고는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작가의 착잡한 태도를 언뜻 드러내지만, 거기서 멈춘다.

4. 한유진은 왜 살인을 하는가. 그것은 그의 본성인가, 아니면 그를 억압해온 것들에 대한 복수인가. 이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해서 아쉽다는 뜻이 아니다. 작가는 명료한 답을 주는 판관이 아니다. 나는 그 답이 궁금하지는 않다. 다만, 이 쉽지 않은 질문을 더 깊이 밀고나가지 못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멈췄다는 것이 아쉽다. 이런 식으로.

"쓸모없고 때늦은 질문이 심장을 죄어왔다. 아머니가 내 말을 믿어줬다면, 이 기사를 쓴 기자처럼 그 일이 사고라고 믿었더라면, 우리의 운명 이조금쯤 달라졌을끼- 어머니의 소망대로 나는 무해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리하여 오래오래 오순도순 살 수 있었을까. 라이터를 켜서 기사에 불을 붙이고 바비큐 그릴에 던져넣었다. 일기인지 메모인지의 속지를 그 위로 밀어넣었다. 한 장이 다 타면 다시 한 장을 밀어넣는 방식으로 시간을 들여 기록을 모두 태웠다. 어머니의 기록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산 채로 화장시킨 기분이었다. 잿불 위에서 돌아갈 길 없는 이전의 삶들이 너울거렸다. 머릿속에서는 분노와 절망과 자기연민이 격류가 되어 휘돌았다. 배 속 깊숙이 억눌려 있던 슬픔이 위액처럼 역류해 올라왔다. 몸은 매가리 없이 축 늘어졌다. 최악이었다. 기분도, 상황도.” (324면)

묻게 된다. 한유진이 '사이코패스' 살인자가 된 것은 "운명"인가. 아니면 자발적 선택인가.

5. 이 소설은 1인칭 시점의 단점이 더 부각된다. 그것은 그 악인의 내적 시점에서 악을 서술한다고 악의 실체가 명확히 표현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관련된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을 보고나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사악하다는 의미, 본성적인 악으로서의 'evil' 이 있다. 두번째의 악은 이유가 없다. 천성적으로 악할 뿐이다. 이런저런 설명을 시도해보지만, 딱 잡히는 이유가 없기에 사악함은 끝내 불가해한 것으로 남는다. 이해될 수 없는 악을 이해하려고 인간은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아마 그 실패의 상징적 표현이 다양한 종교에서 발견되는 악마의 형상일 것이다. 악마의 사악함은 설명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기에 사악함은 무섭다. 인간의 고통과 희생은 그런 사악함이 던진 '미끼'에 걸린 탓일 뿐이다. "
악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이해될 수 없고,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종의 기원]처럼 1인칭 시점을 택하면 그 악의 실체가 온전히 파악될까. 오히려 악의 묘사는 그 악의 불가해성, 악과 서술/재현 사이의 간극과 긴장을 제대로 전달할 때 더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닐까.

6. 이 점에서 [종의 기원]은 예컨대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에서 그려지는, 한유진을 연상시키는 사악한 악인인 '피스'의 묘사와 대비된다.(그리고 한유진의 형상화는 사악한 악인과도 거리가 있다) 순수악인 '피스'의 내면은 소설이 끝나도 다가갈 수 없는 무엇으로 남는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그것에 관한 '합리적' 설명을 시도하지만, 동시에 그 설명을 무화시키는 힘이 작품을 강하게 밀고 나간다. 그것이 3권에 이르는 [모방범]을 끝까지 읽게 만들고, 악의 실체를 생각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어느 서술시점을 택하든, 악을 그리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모방범]은 냉철하게 보여준다. 악의 외부에 있다고 믿는, 혹은 악과 공모관계에 있는 우리/독자는 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그 간극과 긴장을 보여주는 것이 작품에서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때 [종의 기원]이 택한 1인칭 시점의 유효성도 다시 따져봐야할 것이다. 나는 영화 [곡성]의 힘이 이런 간극과 긴장을 놓지 않은데 있다고 생각한다. 악은 '합리적'으로, 평면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악은 "어두운 숲"이다. 그 숲 앞에서 작가는 더 조심해야 한다.

7. [종의 기원]은 정유정의 전작인 [28]이나 [7년의 밤]에 못미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중 하나를 서술시점의 문제와 관련해서 몇자 적었다. 너무 기대가 컸던 것일까. 정유정도 글쓰기의 한 전환점에 서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래도 정유정이 그만의 방식으로 개척하고 있는 '중간 문학'의 지지자로서 그의 다음 행보를 여전히 주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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