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새로운 공간 - 크리티카

  

 



힘의 포획: 감응의 시민문학을 위하여
 bloom    | 2015·06·11 15:56 | HIT : 344 | VOTE : 53 |
면구스럽지만 이번에는 내 책을 소개한다. 평론집 [힘의 포획]이 출간되었다. 어느 비평가의 날카로운 지적대로 비평이 "지하생활자의 정신승리"로 전락한 느낌이 드는 때, 이런 책을 내면서 느끼는 소회는 기쁨보다는 오히려 착잡함이다. 앞으로도 나는 한국문학과 외국문학(영문학) 사이를 위태롭게 왔다갔다 하는 경계인인 독자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경계인 혹은 주변인으로서 한국문학과 문화에 대한 애정과 그 애정에서 기인한 비판적 관심은 놓지 않을 생각이다. 최종 판본은 아니지만, 책의 서문을 올려둔다.

책소개: http://www.yes24.com/24/goods/18404494?scode=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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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예술의 마지막 방어선
--서문을 대신하여

1.
20세기 전반부가 낳은 탁월한 비평가·문화이론가인 벤야민은 비평의 역할에 대해 이런 인상적인 언급을 남겼다. “칭찬하는 일이 지닌 위험성은 비평가가 자신의 신용을 잃게 된다는 데 있다. 모든 칭찬은 전략적으로 볼 때 백지수표이다.”(발터 벤야민, 「문학비평에 대하여」) 여기저기서 비평의 위기론이 출몰한다. 하도 많이 언급되어서 식상한 느낌까지 주지만, 나는 벤야민의 발언을 되새기며 '비평의 위기'에 관해 두 가지 생각을 한다. 첫째, 비평은 예전처럼 읽히지 않는다. 비평의 위상은 추락되었다. 한때 비평, 특히 문학비평이 단지 작품의 해석과 평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비평이자 사회비평이었던 때도 있다. 그때 문학비평은 어떤 사회과학이론이나 논문보다 더 당대 현실의 핵심적 사안들에 주목하면서 그 의미를 밝히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런 비평을 읽으며 문학을 공부했고 사회와 역사를 보는 안목을 키웠다. 그런데 이제 그런 문학비평의 위엄은 사라졌다.

두 번째 위기는 벤야민이 말한 “신용”의 위기와 관련된다. 내가 보기에 지금 비평은 거의 대부분 “칭찬”의 비평이다. 물론 비평에서 정당한 평가와 칭찬은 필요하다. 하지만 전제조건이 있다. 비평이 다루는 대상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만약에 그렇지 못한 대상에 대해 함부로 칭찬을 남발하면 비평은 신용을 잃고, 결국 파산의 위험에 처한다. 칭찬의 비평은 다양한 종류의 포장으로 나타난다. 공감의 비평, 작품의 속살을 어루만지는 비평, 작품과 하나 되는 비평, 훈계가 아니라 대화를 나누는 비평 등. 그때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덕목이 섬세한 텍스트 읽기다. 십분 공감할 수 있는 지적이다. 특히 좀 더 깊이 있는 작품비평을 많이 하지 못해온, 비평공간의 경계인으로서 나에게 강한 자의식을 갖게 만드는 주장이다. 텍스트에 대한 세밀한 읽기는 비평의 기본이다. 하지만 이런 ‘공감의 비평’에는 그 공감의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미흡하다. 비평의 일차적 대상은 분명 텍스트지만, 비평이 텍스트만을 중시하는 '작품물신주의'에 빠질 때 비평의 시야는 협소해진다. 작품의 생산과 수용을 둘러싼 다층적인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대한 고찰이 빠진 비평들의 생산. 비평의 위기는 비평이 이런 맥락을 조망하는 시야를 잃어버렸다는 데도 원인이 있다. 그런 시야를 잃게 되었을 때 비평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책의 여러 글들이 다루는 대상과 주제는 다양하지만, 이 질문의 답을 찾으려는 시도들이다.

2.
내가 좋아하는 비평가 중에는 문학평론가만이 아니라 영화평론가도 있다. 정성일이 그중 한명이다. 어느 팝캐스트 방송에서 언급한 비평가의 운명에 대한 그의 지적이 기억에 남는다. 좀 길지만 인용할 가치가 있다.

“비평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얘기되어 왔습니다. 벤야민이 쓴 비평가의 테제 중에서 열세 번째가, 비평가는 모든 대중을 적으로 삼고,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대변자가 되도록 하라, 라고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우리 시대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중들은 단지 비평가를 적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평가도 그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론, 비평가를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영화감독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평가들이 그들의 영화를 비평했을 때에, (감독들이) 얘기했었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에요. 왜 그렇게 심각하게 보세요? 굉장히... 비평가들을 공격하고는 했었죠. 그래서 비평가들이 거의 죽었습니다. 몰살당하다시피 했죠. 그러고 났더니 그 다음에, 영화감독들이 장사꾼들에게 사지절단 당하고 있지요. 말하자면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감독들에게도, 혹은 대중들에게도. 당신들에게, 비평가들이, 마지막 방어선이라는 사실을 몰랐단 말입니까?

말하자면 이 비평가들이 한 편으로는 매우 거추장스러운 존재겠지만, 매우 불편한 존재겠지만. 그러나 이 사람들이 사실은 당신이 누리고 있는 바로 이 예술의 마지막 방어선이라는 생각을 한다라는 겁니다. 비평가에 대해서 제가 읽었던 가장 아름다운 구절은, 롤랑 바르트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를 만났을 때, 레비가 했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레비가 바르트에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비평가란 뭡니까?’ 그러자 바르트가 대답했습니다. ‘쓰레기죠. 하지만 이 쓰레기는 역사의 쓰레기죠.’ 즉, 이들은 역사가 지나간 다음 항상 뒤에 남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쓰레기들은 전염병이 있어서 무섭죠. 그러므로 이 쓰레기들을 조심해야 됩니다. 저는 이것이 비평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평가는 “예술의 마지막 방어선”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 방어선이 무너지면 문학도, 예술도 무너진다. 비평이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는 말들이 있다. 대중의 감식안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나도 동의한다. 비평가와 대중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만리장성은 없다. 하지만 동시에 새겨야할 사실. 작품에 대한 수많은 읽기와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들 사이에 좀 더 정확하고, 설득력을 지닌 읽기와 그렇지 않은 읽기의 상대적 차이는 존재한다.(유의하시라! 절대적 차이가 아니라 상대적 차이다) 이 차이를 무시할 때 무조건적인 읽기의 상대주의, 혹은 비평의 크메르루지즘을 낳게 된다. 그 결과는 파국적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평론은 주로 평론가와 평론가 지망생, 인텔리들끼리 읽는다. 식민종주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식민종주국에서는 평론의 독자층이 좀 더 넓고, 평론 자체를 적대시하는 무식한 계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인민주의적 반(反)엘리트 선동은 그러잖아도 척박한 이 땅의 문화수준을 바닥으로 끌어내릴 뿐이다. 인텔리라는 기생계층을 박멸해버림으로써 일거에 혁명적 구석기시대로 되돌아간 크메르루주처럼.”(진중권)

비평가의 겸허함은 짐짓 겸손한 척하는 태도나 겸양의 문체가 아니다. 자신의 감식안을 걸고 최대한 주어진 텍스트(그것이 작품이든 다른 비평이나 이론, 혹은 어떤 글이든지)를 가능한 정확히, 면밀히 읽고, 그것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입장의 명료함과 겸허함은 상충되지 않는다. 비평가는 대중의 감식안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 감식안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누구의 비평적 판단이든 그 감식안의 정확성과 타당성을 파고든다. 이 책의 김현론에서 지적했듯이, 그런 입장은 주어진 초월적 객관성을 참칭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하나의 비평적 주장은 다양한 읽기의 공론장, 비평의 공론장에서 검증됨으로써 더 고양된 객관적 읽기로 이어지는 객관화를 지향할 뿐이다. 비평에 미리 주어진 객관성은 없다. 비평의 객관성은 객관화의 지속적인 과정일 뿐이다. 이 책의 글들이 갖고 있는 또 다른 문제의식이다.

3.
벤야민의 에세이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에는 예술작품의 의미에 대한 시인 발레리의 흥미로운 주장이 인용된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인식한다. 즉 그 작품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어떤 이념도, 우리에게 암시하는 어떤 행동 방식도 그 작품을 완전히 설명해내거나 완전히 이해된 것으로 여기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사람들은 향기가 있다고 생각되는 어떤 꽃에서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까지라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 향기를 없앨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떤 기억도, 어떤 사상도, 어떤 행동방식도 그 향기의 영향력을 지워버릴 수 없으며, 그 향기가 우리에게 미치는 힘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 예술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이와 동일한 것을 추구한다.” 이에 대한 벤야민의 논평. “발레리의 이 고찰방식에 따를 것 같으면 한 편의 그림은 그것을 바라볼 때 아무리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어떤 것을 재현한다. 그 원천으로 투영되는 소망을 충족해주는 무엇인가가 그림 안에 들어 있다면 이 무엇은 바로 이 소망을 끊임없이 키워낸다.”

나는 발레리와 벤야민의 견해가 작품의 가치에 대한 중요한 문제제기를 한다고 판단한다. 비평적 통념과는 달리 예술을 이해하는 것은 작품의 “이념”이나 “행동방식”이 아니다. 발레리가 말하는 행동방식이 무엇인지는 애매하다. 아마도 작품이 독자/관객에게 제시하는 삶의 태도이리라. 오히려 예술의 본질은 그것이 전하는 “향기”에 있다. “향기의 영향력”이 중요하다. 예술의 향기는 독자/관객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향기가 우리에게 미치는 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과 예술이 전하는 “기억, 사상, 행동방식”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무엇보다 예술의 향기는 무엇인가? 향기는 객관적으로 작품 안에 이미 존재하는가? 아니면 독자나 관객이 “향기가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발생하는 건가? 우리는 왜 위대한 작품을 되풀이 읽고, 보고, 듣는가? 그때마다 왜 새로운 느낌을 얻는가? 그것들이 전하는 이념이나 사상, 행동방식을 배우기 위해서인가? 물론 그런 것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걸작들은 되풀이 읽어도, 되풀이 보고 들어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향기를 전한다. 그런 향기의 영향력이 오래 미치는 작품이 걸작이다. 이것은 분명 동어반복이다. 하지만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점에서 대중예술과 본격예술은 갈라진다. 되풀이해서 읽고 싶은 대중문학작품은 거의 없다. 따라서 벤야민의 지적대로 “한 편의 그림은 그것을 바라볼 때 아무리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어떤 것을 재현한다.” 여기서 재현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재현행위 속에서 어떻게 향기가 만들어지는가? 향기는 재현의 원본에 있는 건가? 아니면 예술적 재현행위에서 사후적으로 생성되는가?

벤야민의 이어지는 설명. “그 원천으로 투영되는 소망을 충족해주는 무엇인가가 그림 안에 들어 있다면 이 무엇은 바로 이 소망을 끊임없이 키워낸다.” 여기서 소망은 곧 독자/관객의 욕망이다. 예술 작품 안에 이미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계속해서 향기의 영향력을 전하는 그 “무엇”이, 독자나 관객의 욕망을 “키워낸다.” 발레리와 벤야민의 말하는 향기의 영향력을 나는 작품의 감응(affect)이나 글쓰기의 유물론이라는 개념으로 이 책에서 설명하려고 했다. 다만 그런 감응의 예술론·문학론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시간과 능력의 부족 탓이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준비 중인 재현과 감응에 관한 이론비평 연구서에서 좀 더 깊이 천착할 것이라는 다짐으로 아쉬움을 대신한다.

4.
이 책은 크게 4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한국문학공간에서 제기되는 쟁점들을 다룬다. 특히 민주주의 이념의 아포리아, 문학의 정치론, 새로운 시민문학의 구상 등이 글들을 관류하는 열쇠말이다. 나는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와 혼란스럽게 착종된 한국의 상황은 정치적·경제적 근대화의 미흡함만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근대화에 조응하지 못하는 문화적 근대화의 심각한 지체현상, 성숙한 시민사회와 시민문화의 빈곤함이 더욱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판단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운위되는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문학적 규제이념은 갱신된 시민문학론이라고 판단한다. 2부에서는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관계를 살펴본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노벨상 수상 같은 국제적 인증을 받는 ‘금메달 따기’가 아니라 세계체제와 세계문학공간의 역학을 정확히 인식하면서 수준 높은 한국적 시민문학을 창조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 2부를 관통하는 핵심주장이다.

3부는 문화론이다. 건강한 시민문학과 예술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시민사회와 시민문화의 풍요로운 토양에서만 꽃피운다. 성숙한 시민문화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들, 그 도달을 가로막는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는 시도들이다. 끝으로 4부는 신문 칼럼 및 단평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명색이 비평집을 표방하는 이 책에 본격적인 작가론·작품론이 많지 않다는 것이 뼈아프게 느껴지는데, 그런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는 노력이 드러나는 글들이다. 다양한 작품과 쟁점을 다루었지만, 시민문학론과 감응의 예술론이라는 시각에서 작품들을 읽고, 그것을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조망하려고 했다는 점은 밝혀두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각 글의 뒤에 발표연도를 병기했다.

이 책의 글들은 대체로 문제를 제시하고 쟁점을 예각화 하려는 ‘논쟁적’ 성격을 띤다. 되풀이 말해, 나는 비평의 본령인 텍스트의 분석, 해석, 평가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텍스트의 내적 논리를 무시하고 섣불리 비판하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편에 가깝다. 이 책의 글들이 행여 터무니없는 오독과 견강부회의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닐까 은근히 걱정스럽다. 다만, 좁은 의미의 텍스트만을 비평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텍스트를 둘러싼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소홀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 단계 한국문학비평의 어떤 공백지점을 나 나름대로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책 전체에 스며있다는 점도 더불어 밝혀 둔다. 지금 비평계에 열띤 논쟁이 사라진 데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이 책이 사라진 논쟁의 불씨를 당기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5.
책의 서문은 저자의 변명이 허락되는 유일한 공간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믿고 이런저런 변명을 적었지만, 위에 언급한 여러 생각이나 문제의식이 이 책의 글들에 얼마나 제대로 구현되었는지는 물론 별개 문제다. 눈 밝은 독자의 날카로운 질정을 바라며, 이 책을 비평의 공론장에 밀어 넣는다. 점점 상황이 나빠지는 인문사회출판시장에서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 것이 분명한 이 비평집의 출간을 선뜻 맡아주신 산지니 출판사의 강수걸 대표와 세심하게 원고를 살펴주신 손수경, 양아름 편집자께 감사드린다. 이제는 다른 곳에서는 거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상황에서, 나도 몇 편의 글을 기고했던 비평전문지 『오늘의 문예비평』을 지속적으로 출판하면서 지역출판운동의 터전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 ‘작지만 강한 출판사’ 산지니와 좋은 인연을 맺게 되어서 기쁘다. 그리고 여기 실린 많은 글들을 쓰게 해준 자극을 주었던 비평공동체 ‘크리티카’ 동인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누구에게나, 어느 가정에게나 삶의 고비가 닥친다고 한다. 지금 내 가족이 그런 삶의 한 고비를 넘고 있다. 가족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그 고비를 잘 넘기를 늘 기도한다. 그런 마음을 담아 이 책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바친다.

erden21 새 비평집 출간, 축하합니다! 며칠 전에 <한겨레>에 투고하신 글도 보았습니다. 쉬어도 괜찮은 먼곳에 있으면서도 가장 바쁘게 일을 하고 계신 듯하네요. 여름에 오나요 아님 한 학기 더 있다 오시는지?

15·06·14 15:32  

bloom 감사합니다. 저는 8월 말에 귀국합니다. 새 책은 이번 모임때 변현태 선생을 통해 동인들께 드리려고 합니다. 메르스가 여전히 가라 앉지 않나본데, 건강 조심 하시길 바랍니다.

15·06·14 16:41  

jhwang 길영형, 뒤늦게 축하해요. 부지런도 하시지..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다 오세요. 면역력도 만땅으로 키워 들어오셔야 할 듯 ㅎㅎ

15·06·15 10:27  

bloom ㄴ 황선생: 감사^^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밀린 일을 처리한 느낌. 이제 귀국하려니 한국은 메르스니 가뭄이니 왜 이리 어지러운지. 착잡하군요. 건강 조심하시고, 곧 봅시다.

15·06·1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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