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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무능력: 허문영 비평집 [보이지 않는 영화]
 bloom    | 2015·05·01 04:16 | HIT : 330 | VOTE : 50 |


1.
나는 경쟁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한다. 경쟁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거침과 살벌함에 진력이 난다. 하지만 굳이 경쟁이라는 말을 쓰려면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과 경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어제의 '나'보다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는 것.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가 되었는가를 따져보는 것. 자신과의 '경쟁'은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으로 자신을 소모시키지는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어느 작가나 비평가의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굳이 다른 작가나 비평가와 비교할 게 아니라, 그가 쓴 전의 글과 비교해서 지금의 글은 어떤가, 더 나아졌는가, 더 좋아졌는가를 물어보는 게 좀더 생산적인 접근이 아닐까라는 생각. 그런 점에서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비평적 안목은 계속 진전하고 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수년 전에 그가 모신문에 영화칼럼을 다른 평론가들과 함께 번갈아 연재했을 때, 나는 그의 글을 그리 좋게 읽지 않았다. 아마도 지면의 제약이 있었겠지만, 뭔가 '젠체한다'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문학평론과 비슷하게 그 당시 한국영화평론이 마구 끌어왔던 이론들의 원용에 기반한 영화비평이 뭔가 겉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리라.(이렇게 쓰고 보니 누군가에게는 역시 '젠체‘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어줍은 칼럼을 썼던 사람으로서 자의식이 발동하지만, 일단 덮어 두자)

그리고 작년인가 그의 첫 번째 평론집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을 읽었다. 좋은 비평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신문칼럼을 읽으면서 받았던 내 인상을 수정했다. 내 오해와는 달리 허문영은 좋은 평론가라고.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 평론집 [보이지 않는 영화]를 읽었다. 첫 번째 평론집보다 더 좋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책을 낼수록 더 깊어지고, 더 사려 깊고, 더 예리해지는 비평가의 글을 읽는 건 독자로서 기쁨이다. 재미도 감흥도 없는 세상에서(나만 그런가?) 이런 재미와 감동을 주는 책을 읽는다는 건 분명 하나의 기쁨이다.

2.
훌륭한 창작품이나 문학비평이 그렇듯이, 좋은 영화비평은 새로운 인식을 생산한다. 좋은 작가는 작품을 통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감흥과 정서, 혹은 내가 요즘 끌리는 개념인 정동(affects), 그리고 인식을 생산한다. 인식의 생산이 없는 작품을 읽는 건, 잠시의 재미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냥 시간 때우기일 뿐이다.(오해마시라. 나도 때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문제는 그게 읽기와 보기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문학/영화비평이 창작품 같은 정동과 인식을 생산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좋은 비평은, 그 비평이 다루는 작품과 그 작품이 품고 있는 어떤 세계의 모습을 조감하면서, 그 나름의 새로운 인식을 생산한다. 우리가 설령 어떤 비평이 다루는 작품을 읽거나 보지 않고도 그 비평을 읽으면서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이유다. 좋은 비평이 '작품해설'이 되어서는 곤란한 이유다. 비평이 어떤 작품의 '속뜻'을 풀어 전달하는데 머문다면 우리는 굳이 그런 비평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럴 바에는 스스로 그 작품을 다시 읽어 속뜻을 헤아리는 게 낫다. 물론 그런 과정에 해설로서의 비평이 참고가 될 수는 있겠다. 비평이 해설과 다른 이유는 작품이 생산하는 인식의 되풀이가 아니라, 비평은 그만의 작품읽기와 해석을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인식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허문영의 [보이지 않는 영화]는 그런 새로운 인식, 혹은 그런 인식을 위한 중요한 질문들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기한다. 작가의 경우도 그렇지만 좋은 비평도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정답은 없다. 다만, 좋은 비평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들, 혹은 작품의 틈새를 보여주고, 그 틈새가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같이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이 책은 그런 질문들을 여럿 제시한다.

3.
이 책이 던지는 중요한 키워드는 영화와 폭력, 폭력이미지, 재현,애도 그리고 영화의 윤리학 등이다. 먼저 폭력의 문제. 저자는 점점 심해지는 영화의 폭력이미지가 단지 '재미'나 '충격'의 문제로만 다뤄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도덕적 비난은 의미 없다. 오히려 우리는 폭력적이기 때문에 영화에 매혹된다.(나는 최근 출간된 [복제]에 실린 글에서 비슷한 지적을 했었다). 허문영이 보기에, 예컨대 '아덴만' 작전은 액션영화로 한국의 시민들에게 수용된다. 이에 대한 분석은 직접 글을 읽어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설득력 있고 날카롭다.

불의의 현실이 분노와 정의의 폭력을 낳는 게 아니다.  오히려 공격적 본능의 만족, 폭력과 폭력 이미지의 생산을 위해 불의의 현실이 조성된다고 통념을 뒤집는다. 계몽주의적 기획의 이면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다. 정의가 먼저인가. 아니면 공격적 본능과 폭력의 욕망이 먼저인가. 곱씹어야할 질문이다. 저자는 [노예 12년]을 예로 들면서 점점 강해지는 영화의 폭력 이미지를 분석하면서, 우리의 폭력에 대한 감각은 둔화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것은 잔인한 폭력을 즐긴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런 점도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고통의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감각 둔화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저하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영화 이미지가 관객에게 미치는 위험성에 대한 지적인 셈인데, 이를 도덕주의적 비판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허문영에게 "영화는 보이는 세상이고, 세상은 보이지 않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둘은 그렇게 손쉽게 구분될 수 없다. 문학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견해다.

4.
계몽주의적 감성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변호인] 분석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변호인이 시대와 인물을 그리는 이분법, 이 영화가 거둔 대중적 성공은 감독과 관객이 공유하는 어떤 정서적 공감대에 기반한다. 저자는 명료하게 지적하지 않지만, 나는 그게 계몽주의적 기획이라고 이름 붙이겠다. 국가주의자의 폭력적인 이분법과 대중서사의 순진한 이분법(사악한 군사독재/파시스트들과 정의로운 민주투사들)은 과연 얼마나 다른가. "잔혹하고 폭력적인 권력 대 순박하고 가련한 민중, 혹은 사악한 저들 대 순수한 우리, 혹은 오염된 세상 대 순결한 나, 대중 서사가 오래 사랑해온 이 도식이, 노무현과 우리 시대라는 절박한 질문의 사실들로부터 빚어진 서사에 작동할 때, 우리는 이것마저 창작자의 선택으로 존중해야 되는 걸까."(245면)

소위 민주개혁진영이 때로 (물론 악의적인 의도에서 나온 거지만) '깨시민'이라는 비아냥거림을 '저들'에게서 듣는 이유와 관련되는 지적은 아닐까. 소위 '개혁진보진영'이 지닌 도덕주의는 계몽주의의 다른 모습이다. 이 둘은 한국사회, 특히 정치를 둘러싼 넘어설 수 없는 진영주의와 연결된다. 우리는 옳고, 너희들은 틀렸다는 태도. 이런 틀에서 진보나 보수나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상대를 도덕주의적으로 단죄하게 되면 둘 사이에 대화는 불가능하다. 진보 혹은 보수를 자처한다고 저절로 '선'의 편에 서게 되는 게 아니다. 위험한 선험적 도덕주의다. 굳이 구분한다면 합리적 진보와 보수, 엉터리 진보와 보수가 있을 뿐이다. 나는 강준만이 제기해 논란이 되었고 그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지만, '진보의 싸가지'론이 이 쟁점과 관련된다고 본다. 스스로 정의의 편에 서있다고 자임하는 진보나 보수는 싸가지 없게 비쳐질 뿐이다. 본인들은 모르겠지만.

저자가 (그리고 나도) [무한도전]에 매혹된 이유도 대한민국 평균이하를 주장하는 '무도맨'들이 매주 제공하는 "웃음이 절대적으로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가 지닌 무거운 (계몽주의적) 가치와 관념은 일시 중지된다. "웃음만은 거짓에 오염되지 않고 남아 있다"(바흐친). [무한도전]을 보면서 우리는 한국사회의 무거움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된다. 이것을 현실도피라고 주장한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다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계속 그렇게 계몽주의자로 즐겁게 사세요."

5.
저자는 자신이 영화를 보는 특정한 틀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책이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제기. 이미지 예술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환기할 것인가의 문제. 문학도 마찬가지 아닐까. 재현의 문제도 그렇다. 진실을 확정할 수 없다는 태도와 진실은 없다는 태도는 다르다. "전자의 예술가는 실재에 열려 있으며 사물을 듣고 만진다. 후자의 예술가는 현실적인 것의 위악적 변형만을 끝없이 추구한다"(266면)  저자에 따르면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 후자에 속한다. 재현의 불가능성을 갖고 장난을 치는 작가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뛰어난 작가는 진실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말을 되뇌면서 짐짓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가를 묻고 치밀하게 천착하고 그 결과를 형상화한다. 제임슨이 지적했듯이, 모더니즘은 재현의 불가능성에 굴복하지 않고 그 불가능성의 의미와 근거를 작품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작업을 위해 새로운 형식을 시도한다. 그렇지 못하면 짐짓 겸손한 척하면서 "현실적인 것의 위악적 변형"에 그치게 된다.

영화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영화에는 실재의 반영만이 아니라 "위대한 결단, 가혹한 비난, 절박한 전언"이 담긴다. 영화에서 새로운 형식 실험이 관건인 이유다. 우리의 지각과 의식이 포착할 수 없는 것의 포획이 문제다. "부재가 어떻게 환기될 수 있는가. 시선, 지각, 활동의 형식을 일그러뜨리는 수밖에 없다. 일그러뜨림은 해체가 아니다. 해체는 종종 이 세계를 잊고 자기 지시적 모더니즘, 자족적 형식주의에 몰두한다. 홍상수는 일그러뜨려서 이 세계를 다시 본다. 다음에는 다른 방향으로 일그러뜨려서 다르게 다시 본다. 그 일그러뜨림을 통해 매번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종종 죽음의 응시라고 부를 만한 것이 환기된다"(162면)

나는 홍상수가 지닌 독특한 미적 형식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문외한으로서 나는 영화평론가들이 홍상수 영화에 바치는 '외경심'이 때로 불편하다. 하지만 위의 지적은 날카롭다. 결국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면, 혹은 틈새를 드러내는 것은 영화, 혹은 문학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예컨대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탁월함은 세계를 "일그러뜨리는" 형식의 창안에 있다.

6.
끝으로 애도의 문제. 저자는 세월호를 비롯한 참사 앞에서 차마 영화의 윤리학을 논하는 서문을 쓸 수 없었다고 말하지만, 책의 결말은 그 고민의 일단을 드러낸다. "그의 부재를 절대화하고 또 부재를 말하는 것 외의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는 이 아이의 무능력이 우리의 말문을 막는다면, 우리의 통상적 애도가 어떤 층위에서건 자기기만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아이의 무능력은 숭고한 무능력이다. 옹호될 수 없지만 반박될 수도 없는, 또한 해명될 수 없고, 이해될 수도 없는 아이의 비상한 무능력, 그것에 바탕한 무시무시한 결단에 대한 존중이 영화 [제외될 수 없는]을 특별한 영화로 만든다"(283면)

깊이 공감한다. 우리는 어떻게 애도할 수 있는가. "숭고한 무능력"에 이를 수 있는가. 어떻게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가. 나를 비롯한 페이스북 등의 sns 이용자들이 올리는 글들이 혹시 "자기기만"에 빠질 위험은 없는가. sns 라는 우물 안에서만 우물 밖의 방대한 세계를 조명하면서 우물밖 세상이 sns의 틀에 맞춰 돌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페북을 이용한지 한 달 정도 된 지금, 문득 페북 초심자로서 드는 생각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만이 아니라 위에 거칠게 적은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고민을 하는 이들이라면, 꼭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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